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4.25 02:23

올해 전주 국제영화제의 상영작 중에는 최근 새로운 영화 제작의 붐이 일어나는 곳을 만날 수가 있다. 아시아 지역에 속하는 조지아는 중앙아시아 혹은 코카서스 지역이라 불리며 오래 전부터 술과 음식이 풍부한 지역으로 명성이 높았다. 구소련 체제 아래의 남단 국가였던 조지아는 최근 새로운 영화들을 선보이면서 국제적인 관심을 받고 있다.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인 블룸>이다. 이 작품은 성장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두 소녀 에카와 나티아의 우정을 다룬 이 영화는 러시아로부터 해방된 직후의 조지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두 소녀는 화장실까지 함께 가는 절친 십대 소녀다. 그들은 함께 빵 배급을 받으러 가고, 피아노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조지아에서의 청춘 시절을 통과해 간다. 그런데, 남자들로부터 인기가 좋은 나티아가 코테 일행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급기야 두 사람은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에카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티아로부터 코테를 사랑한다는 답변을 듣게 된다.



두 사람의 서먹한 감정은 시간이 흐른 뒤 서서히 회복되어 간다. 에카는 나티아에게 학교생활을 들려주고, 나티아는 결혼 생활의 단면을 말해 주면서 우정을 이어간다. 그러나 평화의 시절은 오래가지 않는다. 밖으로 나돌기만 하는 신랑 코테는 나티아가 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청년 라도와의 사이를 의심하면서, 자신의 일당과 함께 그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소녀들은 살인과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 마주하게 된다.


구소련의 남단에 위치한 조지아는 남성사회의 폭력, 정치적 억압의 상황 그리고 알 수 없는 사건들로 얼룩져있다. 이러한 시대의 공기는 소녀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에카와 나티아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나티아의 삶이 과거의 전통에 얽매여 있다면, 에카는 조금 다른 근대적 여성의 모습으로 성장해 간다. 개인적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포럼 사무실에서 두 여주인공을 본 적이 있다. 서로가 수줍은 많은 아시아인인지라 말을 걸지는 못했다. 아마, 기회가 되었다면 초청을 계획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성장 영화의 규범 속에서 한 시대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독특한 작품이 바로 <F5>이다. 제목인 ‘F5’는 컴퓨터 자판의 수정 기능을 뜻하는 ‘새로 고침’을 의미한다. 강민영 프로그래머가 쓴 <F5>의 내용을 보자.



<F5>는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자신의 장르를 매번 변화하고 변태시키며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의 실험을 시행한다. 영화는 초반부에 한 남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철학적인 이야기를 던진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고 이 모든 위선을 벗어 던지고 싶다’ 전지적 작가인 누군가가 이러한 문제를 토해내고 난 후로 이를 한 자리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십 수 명의 인물들이 차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 모두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분장하여 각자에게 던져진 에피소드를 충실하게 소화해 나간다. 영화에서는 총 여덟 번의 ‘새로 고침’이 이어진다. 여덟 개의 이야기와 여덟 개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영화들은, 현재 조지아가 직면해있는 갖가지 문제점들을 마치 동화를 읽어주듯 순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전지적 시점의 남자(혹은 영화의 감독)는 과거로부터 이어져왔던 조지아의 역사와 문화,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훑으며 이에 관한 전반적인 변화, 인식의 환기를 촉구한다. 이는 곧 심오하며 자극적이고 포괄적인 주제를 담고 있는, 그 어떤 설득과 선동보다 아름답고 풍요롭게 마음을 움직이는, 환상의 서사시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강민영)


끝으로 소개할 조지아 영화 <미소는 나의 것>은 좀 재미있는 작품이다. 조지아에서 열리는 미인대회를 다루고 있는데, 성격이 좀 독특한 미인 대회이다. 강민영 프로그래머의 글을 보자.



10명의 여인들이 환호와 축하를 받으며 무대에 선다. 이들은 8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조지아의 어머니 대회, ‘조르지안 마더’의 본선에 오른 여성들이다. 최고의 요리사, 슈퍼 마더, 탤런트 콘테스트, 관객의 선택, 심사위원의 선택 등 총 다섯 가지 테스트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한 단 한 명의 어머니에게 25,000불과 아파트 한 채를 증정하는, 이들에겐 마치 로또와 같은 일생일대의 기회가 조르지안 마더이다. ‘어머니 대회’라는 독특한 설정도 흥미롭지만 본선 경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방송사의 세속적인 압박과 10명의 여성들이 벌이는 시기와 질투의 서사 또한 주목할 만하다. 각자 자신만의 장점을 내세우며 고군분투하지만 콘테스트 준비가 구체화될수록 그리고 ‘어머니 대회’를 중계할 본방송 날짜가 다가올수록 여인들은 상금이나 우승보다 자기 자신, 즉 ‘어머니’의 존엄성 자체가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방송사의 권위적인 폭력과 이를 통해 전이되는 폐해는 미디어를 통해 개개인에게 뿌리 깊게 박혀있는 대중문화의 그늘을 드러내는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의 백미는 파이널 콘테스트가 열리는 날 벌어지는 소동이다. 하나 둘씩 무대를 이탈하고 중대한 사건들이 터지는 와중에 콘테스트의 프로듀서는 참가자들에게 계속 미소를 지을 것을 강요한다. 이에 환멸을 느낀 여성들이 상금과 상품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며 방송국을 박차고 나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른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강민영)


개인적으로 조지아 여인들이 ‘미인’이라는 것에 동감한다. 하지만, 조지아 아래에 있는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영화제에서 만난 조지아 프로듀서 여인은 미인이어도 다가오는 포스가 좀 부담스러웠다. 이 영화 <미소는 나의 것>도 존엄성의 무너짐에 대한 분노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그게 ‘미소를 강제로 지어야’하는 이 사회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세 편의 조지아 영화가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세 편 모두 여성 문제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 이 시각 조지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변화의 중심에는 조지아의 영화문화가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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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4.24 02:44

칸 비평가 주간 진출을 축하하며

- 한국단편경쟁부문 상영작 <울게 하소서>


칸 영화제의 프로그램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구별이 된다. 메인 부문은 ‘경쟁부문’, ‘주목할만한 시선’, ‘시네파운데이션’ 등이 있으며, 감독주간이라는 별도의 프로그래머와 주체가 운영하는 섹션이 있다. 지난해 칸에서 상영된 <돼지의 왕>은 감독주간을 통해 소개된 작품이었다. 그리고, 최근 크게 주목받고 있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 ‘비평가 주간’이다. 비평가 주간은 장편과 단편 영화를 함께 묶어 상영하면서 이제 막 새로운 영화를 내놓은 감독들에게 눈길을 준다. 


현재 개봉 중인 <테이크 쉘터>는 2011년 칸 비평가 주간에 상영되며 화제를 모았고, 비평가 주간 작품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같은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머드>는 2012년 칸 경쟁부문에 상영이 된 바 있다. 이러한 흐름은 비평가 주간에서 화제를 모은 감독이 관문이 좁기로 소문난 경쟁부문에 입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현재 비평가 주간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의 프랑스의 비평가 ‘샤를 테송’이 책임자로 있으며, 그는 아시아 지역의 영화들을 주로 선정한다. 


서두가 좀 길어졌는데,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영작 중 단편경쟁부문에 소개되는 <울게 하소서>가 2013년 칸 비평가 주간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날라 왔다. 비평가 주간의 단편 선정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장편 <레인보우>를 소개하였고, 최근 <명왕성>을 선보인 신수원 감독 역시 2012년에 단편 <써클라인(Circleline)>을 비평가 주간에 소개한 바 있다. 신수원 감독은 이 영화로 카날 플러스 상을 수상하였다. 카날 플러스는 프랑스의 주요한 방송사이자 단편을 중심으로 다양한 영화 제작 지원을 하고 있는 유력한 방송사이다. 

한은영 감독의 <울게 하소서>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겠지만 칸 영화제에 상영되기 이전에 전주에 얼굴을 내민 유망주의 영화에 주목해 보자. 십대의 출산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그 자체로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메인 카달로그에 수록된 정지연 평론가의 글을 아래에 옮겨 놓는다. 



여고생 아영이는 공터에 방치된 컨테이너에서 한밤중에 아이를 낳는다. 그 순간 남자친구는 탯줄을 끊을 칼을 사기 위해 마트에 들렀다 뒤늦게 돌아온다. 그러나 아영이와 아이는 바닥에 핏자국만 흥건히 남긴 채 이미 사라져 버렸고, 소년은 그곳을 이상히 여겨 순찰하던 경찰에게 의심을 사 쫓기는 상황이 돼버린다. 한편 몸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아영이는 아이를 안고 밤거리를 헤매다 차고지에 정차된 버스 안에 아이를 버려둔 채 도망친다. 영화 <울게 하소서>는 채 어른이 되기도 전에 아이를 출산한 고등학생 커플의 암울한 상황을 그려내는 작품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도움 받지 못한 채 아이를 가져버린 소년소녀 커플은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교복을 입은 채 홀로 아이를 출산한 아영이가 피투성이의 아이를 안고 밤거리를 절뚝거리며 다닐 때, 이들은 마치 죄인마냥 경찰에게 쫓기거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몸을 숨겨야 한다. 짧은 시간, 한밤중 어두운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당면한 출산의 문제를 처연한 감성으로 풀어낸 작품. 


올해 스무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한국단편 경쟁부문은 이 외에도 다양한 관심과 스타일을 지닌 작품들이 많다. 또한, 코리안 시네마 스케이프에도 양익준 감독의 단편과 오달수가 주연을 맡은 <축지법과 비행술> 등 다양한 단편들이 관객을 기다린다. 세계적인 수준을 지닌 한국의 다양한 단편 프로그램은 언제나 빨리 매진이 되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올해는 또 다른 설레임을 갖게 만들어 준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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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4.23 15:07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다양한 영화들이 상영됩니다. 평소에도 쉽게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영화도 있고, 다소 낯선 소재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 라 극영화의 형식을 벗어난 다큐멘터리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다큐멘터리 중 놓치기 힘든 다큐멘터리 다섯 편을 김영진 수석 프로그래머의 추천사와 함께 소개합 니다.

 

<할매-시멘트정원>

철거촌 얘기라면 익숙하지만 그 얘기가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과 스태프들은 부산 산복도로 철거마을 할머니들과 살가운 가족처럼 지낸다. 그게 카메라를 통해 자연 스레 전해온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카메라로 찍는 대상과 같이 산다. 그리고 곧잘 사람들과 떨어져서 조금 있으면 사라질 할머니들이 사는 마을의 후미진 곳들을 찍는다.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 할까. 금이 간 시멘트 속 틈마저도 카메라로 찍으면 아파진다. 부수고 짓고 새로운 공간이 생기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그 인간적인 온기의 흔적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마이 플레이스>

누구나 카메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현실에서 사적 다큐멘터리의 창궐은 흔한 것이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특별하다. 일상적으로 웃고 수다를 떨면서 감독의 가족사를 남김 없이 해부한다. 잔인할 만큼 담담하게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의 관계를 파고드는데 정작 감독 자신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도 그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상처의 해부와 봉합을 집전 하는 의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응집력 있게 꾸준히 찍은 가족사의 면면들을 제대로 구성해낸 다큐멘터리다. 별로 형식적 허세를 부리지 않았는데도 감동의 크기는 어떤 블록버스터 영 화 못지않다.

 

<춤추는 여자>

한국에서 옴니버스 영화는 거의 안 팔리는 장르다. 게다가 이 영화는 현대무용이 소재다. 대중적 관심을 끌기 힘든 조건의 작품이다. 정반대로 생각한다면 영화제에서 찾아 보기 딱 알맞은 작품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와 드라마가 고루 들어 있고 각자 완성도가 수준급이다. 현대무용은 점점 게토화돼가고 있지만 예술이 무엇인지, 예술을 위한 훈련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예술은 왜 귀중한 것인지, 소리 지르지 않고도 알려준다. 무엇보다 예술가들 자신의 자긍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머릿속에 선풍기를 쐬는 느낌의 영화이다.

 

<말하는 건축, 씨티:홀>

우리는 하나의 현상에 대래 즉자적으로 말하기 좋아한다. 건축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신청사라면 더 그럴 것이다. 여기에는 한국사회의 집단적 지성의 척도가 녹 아들어가 있고 행정관료주의의 수준이 들어있으며 정치의 역량도 측정할 수 있다. 비판하거나 찬양하거나 어느 쪽도 남의 일은 아니다.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이 작업 에 참여한 사람들의 땀과 노고는, 그것의 결과물이 어떠하든 허투루 지나쳐버릴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진정으로 힐링을 느꼈다. 우리 삶의 복잡성에 대해, 온갖 천박한 갑론 을박에 대해 정재은 감독의 진정한 영화적 지성으로 응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환생의 주일>

이제 황규적이라는 영화감독의 고유명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별빛 속으로> 이후 그는 자의반 타의반 창작활동의 공백을 겪었다. 1990년에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란 새로운 형식의 영화로 충무로에 태풍처럼 나타났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뜻밖에도 그는 흙집을 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새 영화에 대 한 미련도 없는 듯이 보인다. 셀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영화창작과 흙집 짓기의 가치를 동질한 것으로, 아니 나아가 영화창작에 대한 회의와 자연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삶의 참맛을 즐기는 황규덕 그 자신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완성도 여부를 떠나 현재의 한국영화계와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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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4.13 19:54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인도영화의 편견을 버려라, 발리우드 너머의 영화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에는 알게 모르게 인도영화 고수, 그 중에서도 발리우드의 고수들이 숨어 지내고 있었지만, 발리우드가 한국 영화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2011년 <세 얼간이>의 개봉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인도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돌풍을 일으키며 인기를 끌었던 <세 얼간이>는, 이후 <내 이름은 칸>, <청원>, <옴 샨티 옴> 등 수많은 인도영화들의 릴레이 개봉에 대한 발판을 이루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발리우드’로 대변되는 이 영화들이 정말 ‘인도영화’의 전부일까? 지금까지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발리우드 영화들이 서구문화에 소개되었고 그 특유의 장르적 쾌감으로 인해 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도영화는 곧 발리우드’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는 ‘비욘드 발리우드: 인도영화 특별전’의 영화들을 통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인도영화에 관한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관객들로 하여금 신선한 문화적 충격, 그리고 ‘진짜 인도’를 경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멀고도 가까운 나라, 인도의 모든 것! 


인도는 공식적으로 28개의 주와 18개의 언어로 나누어져 있다. 때문에 어느 도시를 가도 같은 언어와 비슷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보기에, 인도는 매우 다채롭고 정신없는 나라로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수 십 배에 달하는 국토와 12억이 넘는 인구, 고대로부터 내려왔던 힌두문화권 특유의 전통은 한국의 정서와는 전혀 다른, 새롭고도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최북단부터 최남단까지 영하 10도와 영상 40도를 웃도는 날씨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후의 특색 때문에 각각의 주가 특산품으로 내세우는 제철과일과 채소들도 제각각인, 수 천 수만의 신을 섬기는 인도는 말 그대로 다양한 문화의 집대성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수한 국가다. 이에 따른 영화의 발전도 각양각색으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 익숙한 발리우드 영화는 인도의 공식 언어이기도 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힌디어’권을 통해 발전을 이룩한 영화다. 대부분의 인도 감독들은 타 지역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도 힌디어가 가장 넓게 쓰이기 때문에 폭 넓은 배급과 상영을 위해 힌디어로 다시 더빙을 하는 공정을 거친다. 하지만 힌디가 곧 발리우드를 이루고 있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힌디어권은 넓게 통용되는 그 장점을 이용해 발리우드의 미학을 일정 끌어안고 활동하는, 인도에서 가장 활동적인 국제적 감독들을 보유하고 있는 언어권이기도 하다. 주로 수도권 지역인 델리 주변 도시를 포함해 뭄바이와 벵갈로르 등 상업과 경제의 요충지를 바탕으로 성장해왔다. 이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타국의 영화적 경향을 가장 빠르게 접한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중에서도 한살 메타의 <샤히드>와 아제이 발의 <비.에이.패스>는 올해의 발견이다. <샤히드>는 힌두와 이슬람의 분쟁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며 대치하는 두 집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비.에이.패스>는 ‘델리’라는 수도의 그늘을 강하게 비판하는 동시에, 사춘기 시절의 불안한 감정을 유려하게 표현해낸 작품이다. 아심 아흘루왈리야의 신작인 <미스 러블리> 또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1970년대 <신상> 이후 한국에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던 영화 <춤추는 무뚜>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특한 판타지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괴짜 영화 <로봇: 엔드히란>이 인도 최남단 지역의 타밀어권 영화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두 편의 영화들에서 매력을 느꼈다면, 혹은 발리우드라는 장르가 식상해졌다면, 주목해야 할 영화들은 수신디란의 <아자가사미의 말>과 시누 라마사미 감독의 <물새들>이다. 최근 들어 한국에서도 이 타밀지역에 관한 연구가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인도 남단 지역의 부족인 타밀이 신라의 박혁거세 때부터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이론들이 증명되면서부터 더욱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피부도 외형도 습성도 다르지만 더 이상 인도가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철학과 관념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네의 문화와도 매우 밀접하게 와 닿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영화들, 다시 말해 웬만한 영화제를 통해서 쉽게 접하기 힘든 지역의 영화들도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1920년대부터 지금까지 고전적인 신파를 주로 다루고 있던 인도 서남부 지역의 ‘말라얄람’ 언어권의 영화들은 산토시 시반과 같은 국제적인 감독들을 통해 간간히 소개되었지만, 그 뿌리를 이어오고 있는 전통적인 영화들 다시 말해 말라얄람 고유의 문화권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이에 관한 소개로 비주쿠마의 <낯선 하늘>이 상영되며, 소위 인도 예술영화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 우리에게는 사트야지트 레이, 리트윅 가탁 등의 거장 감독들의 이름으로 익숙한 인도 동부 지방 ‘벵갈어’ 권의 영화로 까사르 다스의 <언타이틀>이 소개된다. 또한 작년 한 해를 포함해 올해 초반까지도 인도영화 감독들과 비평가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아오며 그 명성을 지속하는 <레이팍레이>는, 인도 북동부 마니푸르 주에서 온, 마니푸르인들의 영화다. 이 지역은 외국인 방문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어 여행자들도 쉽게 갈 수 없는 지역이라는 특징도 있지만, 무엇보다 버마(미얀마)의 국경과 맞닿아있어 한국인과 비슷한 외모의 사람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교적 친숙한 곳이다. 리투 사린과 텐징 소남의 다큐멘터리인 <해리, 결혼하다> 또한 독특하다. 달라이 라마로 유명한 티베탄 망명 지구에서 나고 자랐던 티베탄 감독인 텐징 소남이 인도인 파트너인 리투 사린을 만나 지속적으로 티벳의 권리 운동과 관련된 영화를 제작해오고 있는 이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뿌리가 있는 ‘다람살라’ 지역에 관한 유쾌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이 밖에 인도에는 뗄루구, 칸다나, 라다크, 마하라티 등 수많은 언어권에서 제작된 다양한 영화들이 존재한다. 이 모두를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지만 인도영화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이라 이를 전부 이야기하기에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는 그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지역, 다시 말해 하나의 문화적 경향을 선도하고 있는 지역의 엑기스만을 선별해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인도’라는 광활한 국가의 스펙트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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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3.28 15:17

발리우드와 비발리우드의 향연, 인도영화 완벽공략 가이드 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인도영화의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많은 인도영화들이 준비되어있다. 흔히 알고 있는 ‘발리우드’부터 ‘발리우드’와는 별개로 단독적인 문화를 내세우며 성장해온 인도 각 지역의 영화들까지 다양하고 독특한 ‘메이드 인 인디아’들이 소개된다. 하지만 인도 혹은 인도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는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할지 혼란스럽기 마련.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인도영화들을 더욱 깊고 재미있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때문에 인도영화에 관한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전형적인 발리우드 마니아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최신 발리우드 영화들 


 2006년 제 7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샤룩 칸 주연의 <비르와 자라>가 상영되었다. <비르와 자라>는 제 10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앙코르 섹션에 포함될 만큼 그 인기가 대단했는데, 사실 <비르와 자라> 이후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발리우드 영화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발리우드를 향한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소개할 기회를 놓쳐왔던 전주에서, 올해는 ‘불면의 밤’의 일환으로 온갖 장르가 총집결된 발리우드 신작 세 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세편 모두 한국에서 발리우드 열풍을 주도했던 <세 얼간이>의 히로인 ‘까리나 카푸르’가 주연 및 조연을 맡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막강한 연기자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인도에서는 어릴 때부터 여신 대우를 받았던 까리나 카푸르는 한 해에 두 세 편의 주연을 맡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발리우드 스타다. 인도의 젊은 배우들 중 ‘최고의 발리우드 댄서’로 평가받고 있는 까리나 카푸르의 연기력은 <내가 여기 있잖아>와 <옴 샨티 옴>의 감독이자 발리우드 흥행보증수표인 파라 칸 감독을 통해 이미 여러 차례 증명되기도 했다. 


▲ <하나는 나, 하나는 너>


 <하나는 나, 하나는 너>에서 까리나는 현대 발리우드의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 어딘가 어리숙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긍정의 에너지를 연기한다. 지금까지 주로 로맨틱코미디의 주연을 맡아왔던 그녀가 이례적인 도전을 한 영화가 바로 <히로인>이다. 한 여배우의 흥망성쇠를 그린 이 작품의 시나리오 초고를 받아들었을 때 까리나 카푸르는 깊은 고민 끝에 거절했다. 영화의 시나리오가 발리우드의 그늘을 꽤 적나라하게 포착하고 있어서, 까리나는 여배우로서의 입지가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래 <히로인>의 주인공은 ‘아이쉬와라 라이’였으나 영화 촬영이 시작된 직후 라이는 임신 때문에 영화를 떠났고, <히로인>의 감독인 마두르 반다카르는 다시 한 번 까리나에게 조심스럽게 러브콜을 보냈다. 까리나는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고 마음을 돌려 주연을 맡기로 결심했고, 그녀의 결심은 결과적으로 마두르 반다카르 감독과 자신의 연기 인생 모두에 파격적이고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히로인>


 <돌격 라토르>는 힌디어로 제작되어 발리우드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지만, 엄밀히 말하면 남부 지역의 영화 정서가 강하게 녹아있는, ‘믹스 발리우드’ 영화에 속한다. 발리우드 탑 스타인 ‘악쉐이 쿠마르’와 떠오르는 신예인 ‘소낙쉬 신하’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인도 수도권에서는 3개월 이상, 지방 극장가에서는 5개월 이상 롱런했던 2012년의 대표적인 발리우드 무비다. 인도 델리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관객들의 반응은 정말 뜨거웠는데, 이 영화 개봉 당시 극장가에는 <다크나이트 라이즈>나 <어매이징 스파이더맨> 등 외화 대작들이 다수 포진되어있었음에도 이들의 기세를 완전히 제압해버릴 정도로 <돌격 라토르>는 오랫동안 인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악쉐이 쿠마르는 이 영화에서 1인 2역을 맡으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는데, 악쉐이 쿠마르 특유의 재기 넘치는 애드립으로 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폭발적인 흥행신화를 이어갔다. 지난여름 인도에서 이 영화를 보고 파키스탄에 넘어갔을 때도 이 영화의 인기는 여전히 대단해서, <돌격 라토르를>를 보지 않은 사람은 대화에 낄 수 없을 정도로 <돌격 라토르>의 메인 음악인 ‘친타 타 타 치타 치타(Chinta Ta Ta Chita Chita)’는 한동안 발리우드 음악 차트 상위권을 차지했다. 흥행으로 보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살만 칸 주연의 <그의 이름은 호랑이>(Ek tha tiger)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으나 인도 남부지방의 관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2012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발리우드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돌격 라토르>를 어떻게든 한국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돌격 라토르>


 덧붙이자면 <돌격 라토르>에도 까리나 카푸르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사실 조연이라기보다 까메오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돌격 라토르>의 가장 중요한 군무씬에서 아름다운 까리나 카푸르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발리우드들, 그 중에서도 ‘불면의 밤’의 첫 번째 밤인 ‘발리우드의 밤’의 영화들은 발리우드 여신급 배우인 까리나 카푸르의 특별전이라는 주제로 엮을 수 있을 것이다. 발리우드 매니아, 혹은 발리우드 입문자 등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중 항상 발리우드 섹션이 아쉬웠던 관객들은 이번 영화제를 통해 세 편의 발리우드 신작을 한꺼번에 관람할 수 있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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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2.05.10 18:41

존 카사베츠의 <남편들 Husbands> (1970)을 본 다음 날

어제, 부산 동서대학교의 임권택영화예술대학에서 영화제 관련한 특강을 하고 돌아왔다. 강의 전에 조교 분께서 학생들이 내게 묻고 싶은 질문들을 미리 받아 보내주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가운데는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영화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뻔한 질문이다. 만일 어떤 기자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더라면 나는 그냥 "영화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을 가져오려 노력합니다"라는 식의 뻔한 답변을 심드렁하게 내뱉었을 것이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2012 JIFF 상영작 '이 곳은 달이 아닌 지구'의 한 장면
2012 JIFF 상영작 <이 곳은 달이 아닌 지구>의 한 장면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학생들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강의 당시 내 답변은 대략 이러했다. (혹은 이렇게 답변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리했는지는 녹취록을 확인하기 전까진 알 길이 없다.) "영화가 기술적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 아닌지를 먼저 고려하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 싶어하고 그 변화의 과정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길 자세가 되어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 같은 영화들을 선호합니다. 반면 자신이 만든 영화를 통해 다른 이들을 변화시키겠다는 각오가 느껴지는 영화들은 보기 불편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 가운데 전자의 태도가 가장 강렬히 느껴진 영화의 사례로 공살루 토샤의 <이곳은 달이 아닌 지구 It's The Earth Not The Moon> (2011)를 언급했다.

(사실 이 영화는 올해 '디지털 삼인삼색' 참여감독 가운데 하나인 라야 마틴이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한국에 소개된 바는 없지만, 마틴의 장편데뷔작 <세상 끝의 섬 The Island at the End of the World> (2004)이 소재나 접근방식에서 토샤의 다큐멘터리와 공유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이 문득 떠오른다. 또한 영화 속 인물이 그 주변의 인물 및 상황과 관계 맺으며 성장하는 과정에 따라 영화 자체도 -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 - 성장하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성장영화'라는 점에서, <이곳은 달이 아닌 지구>는 마틴의 <상영 중 Now Showing> (2008)과도 관련될 수 있다.)

강의 시간에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올해 전주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과 관객상을 동시에 수상한 장건재 감독의 <잠 못 드는 밤> 역시 그런 영화 가운데 하나다. 한편 후자의 사례로 나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과 얼마 전 타계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 같은 작품을 예로 들었다.

2012 JIFF 상영작 '잠 못 드는 밤'의 한 장면
2012 JIFF 상영작 <잠 못 드는 밤>의 한 장면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몇 가지 빠뜨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대략 이런 것 아니었을까? 전자의 영화들은 어떤 식으로건 보는 이들에게 그 태도를 전염시킨다. 딱히 보는 이들을 변화시키겠다는 각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건 우리를 삶으로 돌려보냄으로써, 그와 같은 삶으로의 회귀를 가능케 하는 영화의 힘을 사랑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반면 후자의 영화들은 보는 이들을 변화시키고야 말겠다는 야심찬 의지에도 불구하고 기껏해야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숭배 이상의 결과를 낳지 못한다.

한 가지 더. 한 연출자가 변화의 과정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은 사실 붕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영화 자체를 변화에 내맡긴다는 - 혹은 우연적인 것의 개입을 용인한다는 -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최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존 카사베츠의 <남편들>과 필립 가렐의 <더 이상 기타소리를 들을 수 없어> 같은 영화들을 오랜 만에 다시 보면서 새삼 재확인한 생각들, 혹은 초현실주의의, 일견 미약해 보이지만 여전히 강렬한, 매혹적인 유산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유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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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2.04.22 23:07

잉 량의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When Night Falls> (2012, 70min)

두 번째 장편 <다른 반쪽 The Other Half> (2006)으로 2007년 전주국제영화제 우석상을 수상한 잉 량 Ying Liang이 지아 장커 이후 가장 흥미진진한 중국독립영화감독이라고 말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IMDB 에는 그의 필모그래피도 제대로 올라와 있지 않다.) 올해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든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을 포함, 현재까지 벌써 네 편의 장편을 연출했지만, 몇몇 아시아영화제(전주, 싱가폴, 도쿄필름엑스 등)와 소수의 서구영화제(로테르 담, 비엔나) 정도를 제외하면 그의 작품은 폭넓게 소개된 바가 없는 데다 어떤 나라에서도 정식으로 극장개봉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하지만 '지하전영'이라는 명칭이 그토록 특별하게 느껴지게끔 만들었던 중국독립영화의 정신을 오늘날 가장 강렬하게 계승한 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잉 량일 것이다. 특히 로테르담영화제 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미니-마스터피스' <위문 Condolences> (2010, 19min)과 얼마 전 완성된 (그리고 다가오는 전주국제영화제 기간에 공개될)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에서, 잉 량은 인터넷(특히 SNS와 You Tube) 시대의 비공식담론들에 피와 살을 부여하고 구체화하는 정치적 영화의 스타일을 완성하면서 그의 전작들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성급한 단언이라 나무란대도 굳이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잉 량의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은 2012년의 가장 중요한 중국독립영화, 지아 장커의 <소무> (1998) 이후 가장 정치적으로 용감하고 미학적으로 대담한 '지하전영' 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스틸 컷 1

전주영화제가 1월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알려진 대로,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은 2008년에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살인사건 - 20대 후반의 한 청년이 경관 여섯 명을 살해한 사건 - 에서부터 출발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 청년의 어머 니로, 그녀는 아들이 살인을 저지른 이후 강제적으로 정신병원에 호송(감금)되었다 막 풀려난 참이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최종심이 열리기 전 법원에 보낼 탄원서를 쓰는 중이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이니 만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고 - 다만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극영화라는 사실만은 미리 말해 둔다 - 2008년에 일어났던 실제 살인사건과 관련해 몇 가지 적고자 한다.

아직 할 말이 남았지만 스틸 컷 2

경관 살해범은 양지아라는 청년이었는데 문제는 당시 중국당국과 사법부가 절차를 무시하고 판결과 형을 집행했다는 것이다. 즉 피고인 양지아에겐 제대로 된 소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며 언론보도는 통제되고 양지아의 어머니가 법정 에서 증언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를 정신병원에 몰래 입원시키기까지 했던 것이다. 게다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4 개월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은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등과 같은 이들에 의해 인터넷을 통해 중국 네티즌들에 게 빠르게 전파되었고, 결국 이 사건은 중국사법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이들은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 ‘Yang Jia and China's Unpopular Criminal Justice System’ by Eva Pils)

중국정부는 여전히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잉 량 감독이 알려온 바에 따르면, 최근 공안이 감독의 가족과 프로듀서(이자 그의 아내인) 펑샨 및 그녀의 가족까지 찾아가 조사를 벌였고, 이 영화를 절대 외부 에 공개하지 말 것을, 그리고 이것이 실화에 근거한 작품임을 알려주는 영상자료 및 정보들을 영화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유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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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2.04.22 22:25

‘영상시대와 이장호’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올해 한국영화 포커스 ‘영상시대와 이장호’ 특별전의 준비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애초 계획은 올해 ‘영상시대’ 특별전을 열고 내년에 ‘이장호 감독’ 특별전을 준비해서 한국영화의 전통과 현재를 잇는 중요한 흐름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것이었지만, 워낙 복잡하게 꼬여있는 한국영화 소유권 문제의 해결 없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 어디에서도 70, 80년대의 몇몇 중요한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현재 한국영화는 영화를 소유한 이의 마인드에 따라 전적으로 그 운명이 달라진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그 사회의 문화 집적물인 영화를 공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정책적으로 반드시 마련해야 하지만 그거야 어차피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올해 특별전을 어떻게 준비할까’라는 점이었다.

애초에 계획한 몇몇 작품들을 포기하고 그보다 흥미가 떨어지는 영화로 대체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건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차라리 좀 더 컴팩트하게 가보는 것이었다. 원하는 작품의 일부가 빠진 헐거운 특별전을 준비하느니 차라리 2년 분량의 기획을 압축해서 에센스를 보여주자. 그렇게 해서 2년 계획으로 준비하던 ‘영상시대’와 ‘영상시대’의 앙팡 테리블 이장호 감독전을 통합한 특별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기왕에 압축적으로 준비한 특별전이니만큼 군살 없이 아주 컴팩트하게 최선의 작품을 골라보자. 그렇게 해서 선정된 영상시대 작품 세 편과 이장호 감독 작품 세 편.

이장호 감독
이장호 감독

이 가운데 이장호 감독의 2편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일사천리로 결정되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그 누구도 이 두 작품에 이의를 달 수는 없을 것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말 그대로 전설 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수없이 만들어낸 작품 아닌가? 한국영화산업의 마이더스인 강우석 감독, 독립 다큐멘터리의 대부 김동원 감독, 한국 뉴웨이브의 중심이었던 장선우 감독 등 천차만별의 감독들이 이 영화를 보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으며, 김홍준, 박광수, 황규덕같은 감독들 역시 이 영화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다는 사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당시 젊은 영화 지망생들에게 꿈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다. 영화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시선, 그러나 혹독한 사회에 결코 기죽지 않는 젊음의 신선한 바람은 지금 봐도 여전히 녹슬지 않고 살아있다. 반드시 대형 스크린에서 제대로 기운을 느껴야할 영화.

이장호 감독 작품 '바람불어 좋은 날'의 한 장면
이장호 감독의 작품 <바람 불어 좋은 날>의 한 장면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역시 반드시 35mm 필름으로 제대로 된 환경에서 보아야할 영화다. 새로운 미학적 영토를 개척한 영화들을 발 빠르게 소개해온 뉴욕영화제는 1987년에 두 편의 아시아 영화를 소개하는데, 장예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과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그것이었다. 개인의 심리적 현실과 분단이라는 사회적 현실을 절묘하게 녹여낸 이 영화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자동기술법으로 꿈과 현실,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현실이 분리되지 않는 모호한 꿈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이장호 감독 작품 '나그네'의 한 장면
이장호 감독의 작품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색채의 사용인데, 감독이 꿈꿔왔던 가장 한국적인 색-본인이 ‘아리랑색’이라 표현한 붉은 황토빛 모노크롬색-을 구현해보고 싶다는 감독의 오랜 욕망이 비로소 현실화된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원하는 색을 얻지 못해 일본까지 가서 작업한 끝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색을 얻었다는 영화. 아직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보지 못한 나 역시 개인적으로 꼭 한번 35mm 필름으로 감상하고 싶은 영화다.

이렇게 두 편을 일사천리로 결정한 뒤에, 나머지 한 편을 어떤 작품으로 골라야할지 영 고민스러웠다. 상영 후보작으로 골라둔 두, 세 편의 영화 가운데 무엇을 선정할지 고민하다가 차라리 원하는 작품을 감독님께서 직접 고르시는 편이 좋겠다 싶어 말씀드렸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어우동>을 선택하셨다.

이장호 감독 작품 '어우동'의 한 장면
이장호 감독의 작품 <어우동>의 한 장면

하긴, <어우동>은 여러모로 이장호 감독의 영화쟁이로서의 야심을 실현시킨 영화다. 신상옥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신필름의 많은 사극영화에 참여했던 이장호 감독은 기존 사극영화의 천편일률적인 의상과 색채감각에 불만이 많았다. 그는 <어우동>을 통해 한국영화의 의상 및 색채사용에서 한 차원 도약을 이루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 꿈을 실현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에 대해 ‘색이 쏟아지는 느낌’이라 할 만큼 이 영화는 당시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던 색채의 풍경을 선보였다. 거기에 이장호 감독이 가장 사랑한 배우 이보희의 젊은 시절 눈부신 아름다움이 빛나는 영화가 바로 <어우동>이다.

이 영화는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세련된 성애영화다. 특히 어우동이 성종까지 무릎 꿇리며 자신의 다리를 핥게 만드는 폭폿가 성애장면은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장소를 찾아냈을까 싶을 만큼 탁월한 헌팅과, 배우의 아름다운 나신에 매혹된 카메라의 움직임이 빚어내는 에로티시즘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이 영화가 내세우는 주제와 실제 성애 표현이 조화를 이루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참으로 아름답고 에로틱한 성애영화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지금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어떤 느낌일지 참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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