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4:38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수아가 죽음을 앞두고 쓴 마지막 일기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지 난 모르겠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불안의 책>으로 잘 알려진 이 시인은 평생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살다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기마랑쉬는 포르투갈 북동부의 브라가 주에 위치한 도시로 중세와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들이 현재도 남아 있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곳이다. 이곳은 포르투갈 국가 형성기에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포루투갈의 기원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마랑쉬는 근대적 풍경들과 분위기가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속도와 스펙타클로 점철되어 있는 현대에서 ‘내일이 무엇을 가져올지' 모르는 곳이다. <센트로 히스토리코>는 이런 도시를 배경으로 그 ‘무엇'에 대한 고민을 담는다.



<센트로 히스토리코>는 포르투갈의 역사적인 도시인 기마랑쉬을 배경으로 한 영화, 아니 기마랑쉬에 대한 영화다. 포르투갈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도시를 다루고 있는 영화는 네 명의 거장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태번 맨>, 페드로 코스타의 <달콤한 퇴마사>, 빅토르 에리세의 <깨진 창문>, 그리고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의 <지배당한 정복자> 이렇게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페드로 코스타와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는 포르투갈 현지 출신의 감독이고,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빅토르 에리세는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또한 도시에 대한 옴니버스 영화들 중 <사랑해 파리>나 <뉴욕 아이 러브 유>와는 다르게, 도시에 대한 애정과 애착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는 점도 눈 여겨볼 점이다. <센트로 히스토리코>는 각기 다른 스타일을 가진 감독이 연출한 영화기 때문에, 기마랑쉬 역사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외에는 어떤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기마랑쉬의 시간과 공간으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공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손님이 거의 없는 식당 주인의 하루를 보여준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의 식당에 오지 않는다. 적적한 하루를 보내는 그에게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다. 처연한 듯 하지만 그는 이제 그런 하루가 익숙한 것 같아 보인다. 이 에피소드는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작품들처럼 한 사람의 일상에서 포착되는 인간의 고독을 그린다. 페드로 코스타의 에피소드는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 이후를 다룬다. 카네이션 혁명은 살라자르 독재 정권에 반발심을 갖고 있던 좌파 청년 장교들에 의해서 1974년에 일어난 혁명이다. 영화는 카네이션 혁명 이후 미쳐버린 벤투라라는 인물을 다루는데, 역사학을 공부하고 지속적으로 소외받는 빈민층에 대해 고민해왔던 코스타의 관심이 잘 드러난다. 특히 벤투라가 엘리베이터에서 군인 동상과 나누는 대화는 현재도 이 혁명이 얼마나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빅토르 에리세는 20세기 초에 세워진 섬유공장으로 시선을 향한다. 영화에 따르면 이 공장은 ‘깨진 창문의 공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에리세는 이 공장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통해 영화를 위한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벽에 걸린 큰 사진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에피소드는 사진으로만 간직되어 있는 과거에 대한 진술이다.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는 기마랑쉬에 찾아온 관광객들을 이야기한다. 이 에피소드는 관광객들에 의해 둘러쌓인 정복자 동상을 보여준다. 한 시대를 정복했던 사람은 오랜 시간이 흘러 관광객들의 카메라에 의해 그 자신이 정복당한다. 사실 현지인들은 자신의 삶의 장소를 여행지로 바라보는 게 불가능하다. 올리베이라가 포루투갈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가 기마랑쉬의 관광객을 촬영한 것은 이방인의 입장에서 기마랑쉬를 다시 바라보고 싶은 바람이었을 것이다.

 

네 명의 감독이 그린 <센트로 히스토리코>의 여정은 일상의 고독으로 시작해서 포루투갈의 현재를 있게 한 혁명과 근대화를 이루게 한 공장의 사람들을 지나 현재 기마랑쉬의 역사적 풍경에 도착한다. 공간의 역사는 어떻게 인간을 구성해갈까? 인간은 어떻게 공간의 역사를 구성해갈까? 사람의 기억 속에 한 공간이 장소가 되었을 때, 그 장소의 사연은 우리에게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렇다면 내일이 되면 기마랑쉬는 우리에게 또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

 

전주국제영화제 리뷰어 최혁규(문화연대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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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4:36

덩그러니 밖에 놓여있는 냉장고, 벽에 박혀있는 못, 방치된 전선들,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것들은 누군가 정리하지 않으면, 그 속에 남아있는 기억들과 함께 여전히 외롭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영화 <할매-시멘트 정원>은 개발로 인해 자신의 세월이 묻어있는 정든 집을 떠나야하는 할매의 모습과 산복도로의 풍경을 구도의 변화가 없는 롱 테이크샷을 통해 묵묵히 보여주며, 사라지는 것과 남아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회화처럼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가 동일한 작품을 관람하더라도 사람마다 집중한 포인트가 다르고, 느끼는 감정이 다양하듯이, 영화는 명확하게 보여줘 의미를 전달하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덤덤하게 담아내며, 우리에게 해석의 여지를 주고 있다. 그렇기에 정답이란 없다.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느꼈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 기승전결에 중심을 두기 보다는, 할매와 스태프의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일상과 산복도로의 풍경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기존 다큐멘터리와는 새로운 형식의 실험을 영화의 스타일에 맞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속 카메라는 그저 우두커니 일상을 촬영할 뿐이고, 카메라를 들어보고 싶어 하셨던 할매의 손에 넘어가서는 스태프의 민망한 부위를 찍고 있는, 자연스러운 꾸밈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산복도로라는 공간에 묻어있는 세월의 흐름을 담담하게 그리면서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개발에 대한 문제의식을 던진다. 할매들의 세월과 추억이 담긴 공간을 인위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할매가 존재하지 않는 산복도로라는 공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영화는 산복도로의 일상 풍경을 통해, 정신없이 바쁜 현대의 각박한 삶에 지친 우리들에게 미처 놓치고 있는 느림의 미학,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며, 마치 고향에 내려가 일상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 영화 속 어르신이 풀어놓는 정치 이야기와 할매들의 애정 담긴 맛깔나는 욕과 함께해보자. 그 속에서 느껴지는 정겨움과 인간냄새를 마주하며 웃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장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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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4:34

기시감. 그것의 지배력이 영화의 몰입력을 고조시키는 힘이 된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한 화면과 사건들. 그것은 영화와의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굉장히 유리한 조건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환상 속의 그대를 말하는 이 영화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말로, 환상 속의 그대를 현실로 끌어들이고 싶은 바람을 담은 귓속말을 속삭이고 있기 때문이다.


 

강진아 감독의 <환상속의 그대>는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서 비롯한 분리불안을 평면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들의 행적을 좇고 있자면, 그 징후가 짙게 느껴진다. 하지만, 입체적인 모습으로가 아닌, 평면적이라 표현한 것은 징후의 중첩이 아닌, 나열에 그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급작스러운 떼냄은 그 상처의 크기가 크고 깊어 실패의 모습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통스러운 주인공들의 상처와 강박을 끈질기게 담아냈다. 이 상처와 강박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유아적인 인물의 설정은 분리불안으로 인한 퇴행의 모습으로 가장 시각적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인물의 옷차림새와 헤어스타일에서부터 드러난다. 감정과 반대되는 원색적인 옷차림과 헤어는 마치 어린 아이의 복장 같다. 다양한 복장이 아닌, 차경과의 과거 기억에서 끌어오는 복장과 헤어는 과거와 현재를 잇기 위한 혁근의 안간힘으로 보여지기도, 그 때 이후의 변화를 차단한 정지와 퇴행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분리불안의 절정은 행위적인 측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곁에 없는 차경이 계속 나타난다든지, 끊임없이 귀청소를 하고 잠을 못자는 행위, 대자를 찾는 그의 충동적 행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는 분리된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대상과 자신의 분리를 부정하며 대상과의 동일시로써 드러난다. 이 과정 속 그는 계속해서 부정하고 편안함을 찾아 부유할 뿐이다.

 

<환상속의 그대>에서 드러나는 강박의 모습은 상당히 평면적이라 할 수 있겠다. 대상의 상실이후 드러나는 강박의 모습은 개별적인 프레임 안에서 설명되고 있다. 자전거, 대상의 살아생전의 모습회상, 상처의 모습들은 대상이 사라진 이후 서로 섞일 것처럼 보이면서도 전혀 섞이지 않고 외따로 설명되며 혁근의 상처는 혁근만의 것, 기옥의 상처는 기옥만의 것으로만 표현되며 다소 밋밋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영어제목인 <Dear Dolphin>에서부터엔딩까지 계속 상징되는 돌고래의 모습도 그들의 상처의 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돌고래의 본능 중 하나인 ‘회기본능’과 ‘모성애’ 가장 원초적인 특성을 다루며 부드럽게 불안의 핵심을 파고든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 고향같은, 사랑이자 엄마였던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돌고래로 상징되어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고 곁에 묶어두었던 것이다.

 

이런 고통의 시간이후, 불안의 승화를 보여주며 성장한 인물의 모습을 보인다. 실패로 표현되었던 젖떼기의 과정이 이성의 인식과 처절한 붕괴이후 혼자서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많이 아픈 만큼 많이 성장한 인물들의 모습에서 이미 이전의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닌 흔적으로 존재한다. 그 흔적을 바라보며, ‘이랬었지’라며 넘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 뼘의 성장을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스스로 떠나는 선택을 하고, 스스로 과거를 꺼내보는 대담함까지 그려내며 강하게 그들의 성장을 어필한다.

 

이런 점에서 <환상속의 그대>는 성장담이다. 분리불안의 아이가 스스로 자립하기까지의 과정을 부드러운 영상과 편안한 목소리로 담아낸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렇기에 부담감 없는 기시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과정이 적극적이든지 소극적이든지 우리는 이미 지나왔기 때문이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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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4:33

박정훈 감독의 첫 장편, <디셈버>는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첫인상을 보여준다. 한달씩 나누어진 챕터 위에 뽀얗고 서늘한 이미지와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로 이루어진 <디셈버>만의 분위기는 CF 감독으로 활동했던 연출가가 어떠한 영화적 인상을 능숙하게 조성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가벼운 이미지의 나열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나풀거리는 인상들의 총합이 흩어지지 않고 공들여 세워진 구조에 의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는 <디셈버>는 고전적인 추리 소설을 닮았다. 영화는 관객의 오인과 흥미를 유발할 사건을 초반부에 배치한 뒤, 관계가 확실치 않은 주인공들에 대한 정보를 천천히 조금씩 보여주면서 관심을 끈다. 일관된 톤과 컬러로 간결하게 정리된 영화 속 공간에 시간이 흐를수록, 인물들의 감정은 그들이 입은 옷과 함께 따뜻해지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기대감도 조금씩 마디를 늘려 연주되는 기타 사운드처럼 고조된다. 그렇게 1년의 끝에 다다라서야 영화는 베일을 열고, 완성된 노래와 함께 전달되는 어떤 감흥이 강렬하게 각인된다. 바로 이 감흥이 마지막으로 예비된 영화의 소실점이다.

 

보통의 영화들 중에서도 클라이막스의 정서적 울림을 통해 영화가 전달코자 했던 메시지의 결을 두텁게 하는 경우는 적잖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디셈버>의 경우 이 정서적 환기가 어떤 목적을 겨누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첫사랑의 실연이라는 보편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넓히지만, 이를 통해 그들 각자의 경험을 상기시킨다기 보다는 그저 순수한 감정 상태를 고양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실은 영화가 너무 예쁘기 때문에 비롯되는 인상일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의점과 학교 같은 배경,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사를 촘촘한 체로 거르고 맑은 윗물만 길어낸 듯한, 이를테면 작중에서 인용되는 김애란 작가의 단편들의 라이트한 버젼, 혹은 바다 건너 이와이 슌지 감독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찍었을 법한 영화랄까. 정제된 분말 같은, 서늘하지만 쉽게 휘발되는 감정의 결들. 이런 이유 때문에 <디셈버>에 알러지를 느낄 관객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반대로 강렬하게 사로잡힐 이들도 있을 것이다.

 

<디셈버>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감정을 잘 할 수 있는 구조에 포개 넣은 영화다. 감정의 전달 외에 별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고 관객에게 친절하게 다가서는 영화이기 때문에 정서적인 코드만 맞는다면 후회할 리 없다. 김애란과 이와이 슌지를 좋아하는 이들이 <디셈버>를 찾게 된다면 믿을만한 영화 친구를 새로 얻은 셈이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안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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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4:30

덴마크의 젊은 사이클 선수 라스무스는 챔피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는다. 계속해서 자신과 싸우고 있기 때문일까 화면 속의 그는 말도 많이 안 하고 표정변화도 거의 없다. 더군다나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은 그가 사이클을 타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가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거의 보기 어렵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이거나 피사체인 라스무스와 그의 삶이 실제로 이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주인공이 주위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겪을 수 있는 인간적인 삶에 대해서도 관심을 전혀 갖지 않는다. 분명 라스무스에게는 그의 어머니 또는 애인과 같이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있었다. 설령 라스무스가 그들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해도 목표를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 혹은 자신을 봐주길 바라는 애인의 마음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이 영화의 카메라는 라스무스에게만 집중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라스무스의 기억과 의식에 집중하고 있다. 애초에 영화의 시점은 라스무스가 스스로의 기억을 바라보는 의식을 따라간다. 그래서 카메라가 담은 영화의 이미지들은 라스무스의 기억 속 이미지 같다. 소리들도 현장음이라기보다는 이미지를 따라가는 단편적인 기억들에 가깝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나레이션은 과거를 회상하는 혹은 과거의 기록을 보는 자신의 의식이 하는 말처럼 들린다.

 

관객은 이 영화를 통해 한 선수의 삶을 보지 않는다. 대신 그 선수 본인의 의식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한계의 벽을 부수기 위해 인내하고 고뇌하는 의식이다. 그리고 그 의식을 통해서 밤하늘을 바라보면 둥근 달도 영광스러운 금빛 메달로 보인다. 과묵한 인상에 비해 그의 의식에 비친 인상은 너무나 시적이고 아름답다. <문 라이더>는 영화가 한 인간의 내면을 담아내는 방법 중의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리뷰어 강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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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4:28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쓰여지는 것이다.’를 시작으로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열병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찌 보면 구닥다리 청춘드라마처럼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카메라가 담는 주인공의 문제에 진솔하게 다가가는 자세는 이런 고민이 불필요함을 말한다. 그 때의 우리는 서툴렀고 투박했기에.



<그로기 썸머>는 시인을 꿈꾸는 민준의 고뇌가 주변인들과 사회와 부딪히는 속에서 겪고 있는 고통과 현실과 이상의 괴리사이에서 외줄타기하고 있는 불안함을 그려내고 있다. 이 불안함과 고통 속에서 민준의 감정은 점점 더 극에 치닫는다. 예술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아버지, 고수하던 음악이 아닌 걷기 쉬운 길을 택하는 친구를 통해 민준이 가지고 있는 고민의 중심에서 느낄 수 있는, 가식적인 포장이 아닌 모순적인 모습 그대로 표현해 사실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혼란이다. 그 시기 민준의 감정. 우리가 느꼈을 감정. 지난 후에 아름답게 보일 것도 없는 혼란, 투박함, 날선 모습 그 자체를 <그로기 썸머>에서는 가감 없이 담아내고 있다.

 

이 가감 없는 표현의 정수는 기존의 영화화법에선 볼 수 없었던 감독의 호방한 화면구사방법이다. 기존의 영화촬영이 DCP나 HD로 가는 추세와 다르게 HDV를 사용하는 방법을 택하면서 화면자체에서 느껴지는 거친 색감과 날선 느낌의 화면은 민준의 감정 상태에 힘을 실어준다.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핸드헬드나 영화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클로즈업쇼트는 관객과 민준의 거리를 한층 좁히면서 그와 함께 호흡할 것을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민준의 위에 포개놓는다. 고집스러운 민준의 감정선을 따르는데 세상의 모습은 중요치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로기상태라고 말하고 있는 이 영화는 누구나 겪어봤을 고민에서 발로된 작품이고, 이에서 느껴지는 이상의 판타지 구현에 있어서 낭만에 젖어들게 만든다. 그로 인해 느껴지는 질식, 아픔, 외로움은 더 이상 그 자체의 의미만을 지니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 치기어린 마음에 부리는 투정이 아닌 투정을 넘어서서 느낄 수 있는 그만의 카타르시스말이다. 이것으로 인해 영화는 단순한 청춘드라마가 아닌 투박하지만 강한 흡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김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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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3:59

오늘은 종일 비가 왔어요.
그걸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봐요.
그걸 레바논 구름이라 할까 봐요.
떴다 내리는
그걸 레바논이라 합시다. 그럽시다.

 

최정례 시인의 시 「레바논 감정」 중에서.

 

정영헌 감독의 영화 <레바논 감정>은 그 제목을 최정례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따왔다. 레바논과 감정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은 예비 독자와 관객에게 생경한 느낌을 전달한다. 곧 궁금해 한다. 레바논 감정이란 무엇일까.


 

영화의 흐름은 남자 주인공인 헌우로부터 시작했다가 이름 모를 여자에게 시선을 두고 이윽고 둘 사이를 진동하다 하나로 합쳐진다. 그 둘의 이야기를 뼈대로 다양한 주변 인물들이 영화 안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인물들의 배경, 이를테면 직업군이나 전사같은 것들은 하나도 설명이 되지 않은 채 곧장 이야기를 시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얼핏 돌아가는 상황의 파악이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화는 소복히 눈이 쌓인 아름다운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영화 속 인물들이 마을 안팎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지도에 점을 찍어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저지르는, 살인에서 소소한 강탈에 이르는 크고 작은 죄과들은 놀랍게도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그에 합당해 보이는 벌을 불러온다. <레바논 감정>과 유사한 이야기를 다루는, 혹은 비슷한 감정을 내포하는 영화들에서 영화 속 사건들이 미결로 남거나 균형이 흐트러진 상태로 방치된 채 거기서 유발되는 감정을 영화의 강력한 엔딩을 위해 남겨두는데 반해, <레바논 감정>에는 흐트러진 상태를 어떻게든 다시 다잡아보려는 이상한 의지가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되돌리려는, 아니 혼란의 와중에서 어떻게든 합당한 섭리, 이를테면 인과응보 같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신의 섭리를 찾고 싶어 하는 의지. 감독은 이런 말을 싫어하겠지만 <레바논 감정>은 종교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헌우는 극중의 상대에게 종교에 대한 실망감, 신의 무력함, 자괴감에 대해 토로한다. 그는 크나큰 상실을 겪었고 그 상실감은 위로가 되어줄 믿음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 주인공이 겪는 '자초한 고난'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하고 피하고 싶게 만든다. 그 고난과 주인공의 상태가 설득이나 회유로 돌아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과 관객은 더더욱 무력해진다. 우울감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마음으로 본인을 가득 채우고 급기야 그것이 넘쳐 주변까지 젖어들게 만든다. 종교마저 이를 막을 수 없다면 제 정신으로 버텨내기란 절대로 어려운 일이다. 그런 헌우에게 하나의 비명으로 등장한 여자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차라리 하나의 축복이다. 그녀가 몰고 온 온갖 사건들은 (헌우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수행 과제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갑자기 찾아온 그녀를 도울 수 있는 능력과 책임감은 오로지 헌우에게만 부여되었고, 그것은 헌우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가장 확실한 치료제 아닌가. 그는 더 이상 고난을 자초하지 않아도 된다. 이 축복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옥상 위 커다란 십자가인지 꿈에서 보았던 여인인지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불행했던 그에게 거기서 벗어나도록 길을 마련해주는 의지를 보았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다시 답을 할 때가 되었다. 레바논 감정이란 무엇일까. 상실감, 우울감으로는 부족하고 축약되지 않는 그 말하기 힘든 감정은 단순히 그것을 표현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지각으로는 도무지 한 단어로 응축할 수 없기 때문에 레바논과 감정이라는 상이한 두 가지를 부딪쳐 본 것이 아닐까. 주인공 헌우가 영화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겪은 일들을 마지막 순간에 다시 돌이켜봤을 때 느꼈던, 그 이상한 조화가 레바논 감정이 아닐까 한다. 이를 영화로 표현하기 위해 구성했던 서사, 인물의 처지, 행동,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이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영화의 섭리, 혹은 영화의 의지가 레바논 감정을 받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안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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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전주국제영화제 공식블로그 JIFF 2013.05.09 13:57

감독들이 무용수의 손과 발을 정말 사랑했나봐.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 <춤추는 여자>를 지켜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어느 하나 빠짐없이 수많은 손발의 움직임을 클로즈업하기에 여념이 없다. 카메라에 잡힌 스무 개의 가락지들이 이리 저리 명멸하며 부서지는 걸 보면, 과연 무용은 발끝에서 시작하여 손끝에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고 허풍을 떨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일까. 각기 다른 배경과 직업을 가진 감독들이 일궈낸 다섯 개의 에피소드도, 꼭 엄지에서 새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길이와 모양을 가진 손가락들 마냥, 서로 다른 리듬과 느낌의 마디들이 순서대로 그 자리에 위치한 것이 자연스러웠다. 누군가 이를 지켜본다면 "보기에 참 좋았다"고 말할 것처럼.



첫 에피소드인 유재미 감독의 <싱크>는 엄지를 닮았다. 아무런 설명 없이 묵묵히 움직이면서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춤을 추는 무용수들을 비춘다. 세 명의 남녀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함부로 몸을 털거나 무용수들에 발맞춰 이동하진 않지만, 멀리서 혹은 숨소리가 들릴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다양한 앵글을 통해 크고 작은 운동을 잡아낸다. 사각의 프레임을 넘나드는 무용수들은 열락에 빠진 것처럼 자신의 춤에 몰두해 있다. 박선일 감독의 <여름 날>은 검지처럼 차분하고 섬세하게, 일반 관객들에겐 낯선 현대 무용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소녀가 그림의 힘을 빌어 소년의 춤에 다가가는 이야기는 관객이 영화의 힘을 빌어 무용에 다가가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아름다운 데칼코마니다. 가장 길고 가파른 중지의 역할은 <죄인>이 맡았다. 그룹의 유일한 필름메이커인 추경엽 감독이 만든 영화답게, <죄인>은 비극적인 서사를 통해 무용과 삶의 관계를 탐구한다. 감독은 자칫 통속적으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를 용감하게 밀고 나가면서 무용을 하는 여자에게 무용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반대로 무엇이 돼주지 못하는지를 살핀다. 반지를 끼우는 약지에는 두 청춘이 무용의 합을 맞추는 <오늘, 내일, 그리고>가 어울린다. 사실 본격적인 연애를 그리는 영화는 아니지만, 무용을 배우는 비전문 배우들의 풋풋함과 전공자 특유의 '찰진' 몸짓들이 빚어내는, 조금은 어색하고 그래서 더 귀여운 모습들은 왠지 모를 연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조지영 감독의 이 단편은 그 독특한 매칭을 통해 극에서 '몸의 움직임'이, 표정과 대사에 못지않은 정서를 전달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영화다. 마지막 영화 <생각보다 가까운>은 제목 그대로, 무대 앞 관객으로만 지켜봐왔던 보통의 사람들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미는 영화다. 그동안 무용을 선망하거나 자신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라고 생각해왔던 이들이 자신을 표현 할 수단, 또 다른 언어인 춤을 배우고 거기서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과정을 다큐의 형식을 빌어 담아냄으로써 영화 속 제자들은 물론 영화 밖 관객들까지 춤의 영역으로 유혹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영화의 GV에서 청년부터 중년에 달하는 다양한 관객들이 일명 '망 댄스'라고 부르는 박준희 감독/안무가의 레슨에 참여하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내왔는데, 이는 요 앙증맞은 영화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졌는지를 방증한다.

 

<싱크>에서 <생각보다 가까운>에 이르기까지, 대개의 옴니버스 영화는 각 에피소드들이 하나의 주제나 컨셉만을 공유한 채 사방으로 발산하는데 반해, <춤추는 여자> 아래 형형색색의 에피소드들은 놀랍게도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하나의 리듬을 형성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이어져왔던 협동 작업과 공동 창작의 결실로 바라볼 수도 있겠으나, '춤추는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습득하는 일종의 균형 감각이 아닐까' 신비화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겠다. 서로의 발을 밟지 않고, 애써 남보다 부각되려고 욕심 부리지 않으면서 전체의 흐름에 조응하는 감각. 그 감각을 잃지 않고 이미지로 가져왔을 때, 무용수의 곱게 뻗은 손과 발처럼 아름다운 피사체가 탄생할 수 있음을 <춤추는 여자>는 보여준다.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안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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